인문학광장 마음을 채우는 따뜻한 문장과 깊은 사유가 머무는 공간입니다.

신영규 시인, ‘저무는 강가’에서 외 2편

  • AD 내외매일뉴스
  • 조회 44
  • 2시간전
                   ▲ 신영규 시인
 
 
 
저무는 강가에
 
 
가시밭에 찢긴 세월
발자국마다 붉은 물이 고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짊어지고
눈물 젖은 밤을 몇 번이나 넘었던가
 
황혼은 핏빛으로 강물을 물들이는데
얽히고설킨 날들이 목을 죄어온다
채찍질 같은 세월 앞에
무너진 몸 하나 으깨어 서지 못하고
잡으려 내민 손끝엔
차디찬 그림자만 부서지는가
 
아, 나에게도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봄날이 있었는데
가슴 깊이 박힌 침묵과
산산이 흩어진 깨진 기억의 조각들
 
노을이 강 저편으로 목이 메어 넘어가듯
나도 그렇게 저물어 가는데
어둠이 밀려오는 강가에서
상처투성이인 내가
나를 부르며 울부짖고 있다
 
 
■ 시인 정성수의 감상평 ■
 
 
시「저무는 강가에서」는 인생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지나간 세월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강가라는 이미지 속에 담아냈다. 시인은‘가시밭에 찢긴 세월’,‘발자국마다 붉은 물이 고였다’는 표현을 통해 삶의 고단함과 상처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특히 어깨를 짓누르는 짐과 눈물 젖은 밤은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삶의 무게를 보편적 정서로 승화시켰다.
 
가장 큰 매력은 황혼과 강물, 그림자와 노을이라는 자연의 이미지가 시인의 내면 풍경과 긴밀하게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핏빛으로 물든 강물은 단순한 저녁 풍경을 넘어 지나온 삶의 아픔과 회한을 상징하고,‘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봄날’은 잃어버린 청춘과 행복했던 기억을 환기한다.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상처가 대비되면서 시적 긴장감이 깊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어둠이 밀려오는 강가에서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스스로 부른다. 이는 절망의 표현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위로하려는 내면의 외침으로 읽힌다. 삶이 저물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는 시를 단순한 슬픔의 노래에 머물지 않게 한다.
 
시는 삶의 굴곡을 진솔하게 담아내면서도 자연의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형상화했다. 고통 속에서도 기억과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울림이 오래 남는다.
 
 
 
 
 
소멸을 품은 꽃
 
 
꽃이 핀다는 것은
향기를 비워낼 채비를 마쳤다는 고백
탄생은 이미
사라질 길 위에 첫발을 떼는 일이다
 
마음은 순간마다 눈을 떴다 감고
한 생각이 바스라진 흙 위에서
또 다른 내가 돋아나니
우리는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며
낯선 먼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가을 숲이 제 몸 같은 낙엽을 놓아주듯
아름다움은 늘 저무는 끝자락에서 피어난다
들숨과 날숨 사이, 그 좁은 틈에 잠시 머물다
어둠을 배경 삼아 선명히 타오르는 나날들
 
사라지는 것들의 등 뒤로 나지막이 던지는
아름다운 물음표 하나로 저물어가는 한 해
 
꽃이 진다는 건
앞 파도가 뒤 파도를 밀어 올리는 겹침는 결,
네가 저문 자리에서 내가 다시 피어나는
잠시 빛을 빌려 입은 우리 인연이다
 
 
■ 시인 정성수의 감상평 ■
 
시「소멸을 품은 꽃」은 꽃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순환을 통해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깊이 성찰한 작품이다. 생명과 죽음, 아름다움과 사라짐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 지는 시간을 품고 있다는 발상은 인생의 유한성을 바라보는 시인의 성숙한 시선을 잘 드러냈다.
 
첫 연의“꽃이 핀다는 것은 / 향기를 비워낼 채비를 마쳤다는 고백”은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다. 꽃의 개화를 단순한 생명의 절정이 아니라 소멸을 준비하는 고백으로 바라봄으로써, 존재의 아름다움이 영원함이 아니라 유한함 속에서 빛난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탄생은 이미 / 사라질 길 위에 첫발을 떼는 일이다”라는 구절 역시 삶과 죽음의 관계를 간결하면서도 철학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중반부“우리는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며”라는 구절은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자연의 순환과 연결하고 있다. 한 생각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내가 돋아난다는 표현은 상실과 성장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가을 숲이 낙엽을 놓아주는 장면 또한 아름다움이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놓아줌의 과정에서 완성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마지막 연은 시의 정서적 깊이를 더욱 높였다.“네가 저문 자리에서 내가 다시 피어나는”표현은 소멸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보는 긍정적인 생명 의식을 담고 있다. 또한, 꽃이 지는 것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앞선 존재가 다음 존재를 밀어 올리는 겹침의 결이며, 인연 또한 잠시 빛을 빌려 입은 자연적 순환임을 보여준다. 사라짐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시는 철학적 사유와 서정적 이미지가 조화로워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은 물론 지난 시간까지 돌아보게 하는 여운이 깊다.
 
 
 
슬픔이 나를 견딜 때
 
슬픔은
창문 없는 방처럼 시작되었다
 
숨은 천장에 걸리고
울음은 벽을 타다 말라붙는다
 
괴로움은
내 안에서 천천히 자라
가시 돋친 의자가 되어
나를 앉힌 채 꿈꾸게 했다
 
나는 꿈속에서도 아팠다
누군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에는 온기가 없었다
 
외로움은
내 안에 오래 머문 어둠이었다
 
물을 붓지 않은 그릇처럼
텅 빈 나를
나는 매일 안고 잤다
 
별은 내 머리 위에서 흩어졌고
하늘은 목젖까지 내려와
나를 삼키려 했다
 
나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 비로소 알았다
 
내가 견디는 게 아니었다
슬픔이
나를 견디고 있었다
 
 
■ 시인 정성수의 감상평 ■
 
시「슬픔이 나를 견딜 때」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슬픔과 외로움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고통을 견디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슬픔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내면의 진실을 섬세한 언어로 드러냈다.
 
첫 연‘슬픔은 / 창문 없는 방처럼 시작되었다’는 슬픔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구도 빛도 없는 공간에서 숨조차 천장에 걸린다는 이미지는 절망의 무게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또한‘가시 돋친 의자’와 ‘물을 붓지 않은 그릇’은 괴로움과 외로움이 얼마나 일상 깊숙이 스며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물에 감정을 부여하는 표현은 추상적인 슬픔을 구체적 형상으로 바꾸어 생각을 자극한다.
 
시의 문학적 깊이는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내가 견디는 게 아니었다 / 슬픔이 / 나를 견디고 있었다’라는 반전은 작품 전체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우리는 자신이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고 하지만, 때로 슬픔이라는 감정이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는 슬픔을 부정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인식이다.
 
시는 어둠 속에서도 인간이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슬픔은 상처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거울이다. 결국, 시인은 고통의 끝에서 새로운 위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슬픔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과 따뜻한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 신영규 시인은
 
시인 신영규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1987년부터 일부 중앙지와 지방지를 넘나들며 인간관계의 본질과 사회적 격변을 통찰하는 칼럼을 집필해 왔다.
 
1995년 월간『문예사조』와 1997년 월간『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한 이후 시, 수필, 칼럼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으며, 2025년부터는 서사의 확장을 위해 소설 습작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수필집『숲에서 만난 비』,『그리움처럼 고독이 오는 날』,『사유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고독의 안부』, 시집『바람도 꽃피는 계절이 있다』, 칼럼집『돈아 돈 줄게 나와라』, 『펜 끝에 매달린 세상』,『오프사이드 인생』,『삶에게 묻다』,『침묵은 누구의 편인가』 등이 있다. 제2회 한국동서문학상, 제6회 정읍사문학상 전국 공모 시 부문 우수상, 제1회 고천예술상을 수상하며 그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mailnews7114@gmail.com〕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싸이공감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네이트온 쪽지 구글 북마크 네이버 북마크